| |
 |
|
| |
이유리 (문화체육부) |
|
칠레 떼아뜨로 시네마(Teatro Cinema)의 '신 상그레(sin sangre)'를 지난 23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봤다. 극단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현재 연극과 영화 언어의 결합과 융화를 꿈꾸며 새로운 실험에 집중하고 있다. '신 상그레' 역시 연극과 영화의 기막힌 컨버전스(convergence)였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연극인지 영화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파격적이고 정교한 무대장치, 마법에 홀린듯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 그리고 피와 복수의 역사에 대한 따끔하면서도 시적인 대사들이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을 선사했다.
연극연출가들이 고민하는 것이 연극을 영화처럼 광대한 스펙터클로 표현해낼 수 없는 점, 장면전환을 쉽게 할 수 없어 사건을 빠르게 전개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연극만의 장점 즉 현장의 감동, 관객과의 직접적인 소통도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 상그레'는 그런 고민을 한꺼번에 무너뜨렸다. 즉 '시네마 연극'을 표방하며 이 두 장르의 장점을 정교하게 결합, 연극이 새롭게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자동차가 나를 덮칠 것 같은 영상, 시공간을 뛰어넘는 영화적 요법이 이 작품에서 사용돼 제한된 연극무대의 한계에서 벗어났고, 몇몇 장면에서는 위에서 밑을 보는 듯한 구성을 사용해 평면적인 시선처리에서도 벗어났다. 주인공 뒤에서 펼쳐지는 영상효과는 단순히 배경으로만 쓰인 게 아니라 등장인물의 심리상태를 나타내기도 해서 상황을 관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또 등장인물에 대해 감정이입이 쉽게 되는 효과를 내기도 했다. 이같은 효과가 가능했던 열쇠는 세트에 있었다. 스크린 안에 또다른 스크린 즉 스크린이 두 개가 설치됐기 때문. 앞의 스크린은 얇게 제작돼 뒤의 스크린 장면이 보이도록 되어 있었고, 그 중간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했던 것이다. 이런 기술적인 신선함은 관객들을 이 작품에 더욱 몰입 하도록 만들었다.
비단 기술적인 부분뿐 아니라 이 작품이 담고있는 주제 역시 관객들을 매혹시켰다. '신 상그레'는 전쟁의 잔인함과 한 어린 소녀의 산산이 부서진 세계, 그리고 평생에 걸친 복수와 치유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를 죽인 남자들을 차례차례 살해한 니나. 마지막 남자 티토를 찾아온 니나는 그와 긴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그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티토와 니나 둘이 각자 기억하고 있던 진실은 '단편'일 뿐이었다. 그들은 대화를 통해 마치 퍼즐게임을 하듯 진실의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나간다. 결국은 그런 것이었다. 전쟁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다는 것. 복수라는 것은 부당하게 학대를 받아온 모든 이들의 마음과 행동 속에서 되풀이되어온 똑같은 실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결국 어떠한 삶도 상실이나 희망으로부터 온전할 수 없다는 것. 마지막은 그렇게 반전으로 향했다. 신 상그레는 'without blood'를 뜻한다. '복수'의 끝이 선혈이 낭자하게 끝나는 여타의 작품들과는 달리 신상그레는 그 제목처럼 '아무런 피도 없이'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은 억울하게 당하고 복수를 한뒤 갱생의 삶을 결심하는 '신파의 세계'와는 확실히 각을 세우고 있다. 관객들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대신 죄와 벌이라는 사안에 대해 좀더 진솔하게 접근한 이작품은, 관객들에게 '복수의 정당성'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는 진정한 수작이었다.
[경인일보]2008년 05월 26일 (월)/이유리 agnes71@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