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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천상병 시인의 아내 목순옥 씨가 천진난만한 표정의 남편 사진 옆에서 남편을 추억하고 있다. <사진 제공=의정부 예술의전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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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궁한 삶의 극한 속에서도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여 인생의 의미를 일깨워준 참자유인, 진짜 시인의 죽음으로 이 땅에서 시인의 신화 시대는 막을 내렸다."
1993년 4월 28일, 천상병 시인(1930~93)이 타계했을 때 문학평론가 김재홍 씨는 이렇게 추모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없었다면 `참자유인의 문학`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편의 시심과 천진함을 유지하게 만들었던 사람, 바로 천상병 시인의 아내 목순옥 씨(74)다.
23일 의정부 예술의전당에서 목씨를 만났다. 그는 마침 같은 날 개막한 `천상병 예술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지난 23일에는 `천상병 시(詩)상 시상식`이 열려 송경동 시인이 상을 받았다. 예술제는 30일까지 의정부 예술의전당에서 계속된다.
-예술제 준비 때문에 많이 바쁘시죠?
▶벌써 7회째네요. 그래도 올해는 천상병 씨 생전에 가까웠던 이외수 작가 특별강연도 있어서 더욱 특별할 것 같아요. 1988년에 남편이 간경화로 강원도 춘천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자주 찾아왔을 정도로 가까운 후배였어요. 그때 이외수 씨가 데려왔던 두 아이가 벌써 결혼을 했다네요.
-오는 28일이 천상병 시인 17주기고, 5월 14일은 두 분의 결혼기념일이었죠. 요즘 들어 생각이 더 많이 나실 것 같습니다.
▶뭐 매일 하죠. 인사동에 있는`귀천` 찻집에도 사진이며 시집이 있으니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솔직히 이맘때면 감회가 더 새로운 게 사실이에요. 좋은 날도 되면서 돌아가신 날도 되니.
(천상병 시인과 목씨의 결혼은 문단에선 너무도 유명한 얘기다. 1972년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었을 때 천 시인의 몸과 마음은 이미 피폐해 있었다. 동베를린간첩사건(일명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전기고문 등을 받은 후유증이었다. 간첩 혐의를 받은 친구(서울대 동창)에게 고작 몇백 원을 빌렸다는 게 죄목이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쓰러져 있다가 행려병자로 분류돼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실려간 시인이 죽은 줄 알고 문단 친구들이 천상병 유고 시집 `새`를 냈던 해프닝이 벌어진 것도 이때쯤이다)
-천 시인과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친정 오빠(목순복)의 친구였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경북 상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처음 만났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왔을 때부터는 명동에서 거의 매일 봤죠. 문단 안팎의 일을 했던 오빠와 친한 문우(文友) 중 한 명이었거든요. 당시에 30대 초반이었던 천상병 씨는 까만 넥타이를 삐뚤게 매고 양복을 입고 다녔어요. 멋쟁이였죠.
-결혼하기까지 과정은 어땠나요
▶(동백림 사건으로) 잡혀간 이후부터 천상병 씨의 상태가 안 좋아졌어요. 결국 행방불명이 되는 사태까지 벌어졌죠. 한참을 찾다가 모두 울면서 `새`를 냈어요. 그랬더니 서울시립병원에서 데리고 있다고 전화가 오더라고요. 약 4개월 동안 매일 병문안을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병원장이던 김종해 박사님이 "저 사람이 글을 쓰고 못 쓰고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두 분이 결혼하면 어떨까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결혼식 사회는 극작가인 신봉승 씨가, 주례는 김동리 선생님이 해주셨어요.
-가진 것이라고는 병과 가난밖에 없는 남자였는데…
▶처음에는 그냥 돌봐드린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남편으로는 빵점이었죠. 그런데 본인의 시만큼이나 맑고 천진한 사람이어서 미워할 수가 없었어요. 천상병 씨도 43세(결혼했던 나이) 이후에는 나 때문에 살았다고 얘기한 적 있어요.
("지나고 보니 모두 소꿉장난 같았다"고 목씨는 21년 결혼생활을 회상했다. 하지만 부부의 실제 생활은 끼니 걱정을 매일 할 정도로 힘들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다. 처음엔 동양자수를 하며 먹고 살았고, 잠깐 황학동 근처에서 고가구 가게를 한 적도 있다. 1985년엔 남편의 친구인 강태열 시인에게 300만원을 빌려서 인사동에 전통찻집을 냈다. 천상병 시인의 유명한 작품 제목에서 딴 `귀천`이다)
-`귀천`은 단순한 찻집이 아니라 당시 문인들의 사랑방 노릇도 했죠. 이젠 인사동의 상징이 됐습니다.
▶예전 단골들은 모두 70~80대 노인이 되어서 자주 드나들지 못해요. 신봉승 씨나 신경림 시인 정도가 그나마 자주 찾죠. 젊은 문인들도 가끔 찾아오는데 솔직히 누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어요.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이 견학을 온 적도 있답니다. 견학 온 아이들에게 시를 읽어주고, 한 번 읽어보라고 하면 다들 좋아해요. 시란 남녀노소 모두에게 아름다운 마음을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인사동이 예전과 비교해 너무 달라져서 안타깝진 않으세요?
▶2003년에 문화지구로 지정됐지만 오히려 옛날 모습이 더 사라졌어요. 너도나도 돈 벌기 위해 건물을 올리는 동안 과거의 맛이 없어졌지요. 정부가 보존에 좀 나섰어야 했는데요. `귀천`도 모습이 많이 변했습니다. 실내장식도 달라지고 입구도 달라져 낯설어 하는 분도 많아요.”
여기서 짓궂은 질문을 하나 던졌다. 만일 시간을 되돌려도 천상병 시인과 결혼했겠냐고 물었다. 목씨는 주저없이 "그렇다"며 "생전에 못했던 것을 해드리고 싶어서"라고 이유를 밝혔다. "여행도, 음악회도 함께 가드리지 못한 게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으세요?
▶올해 의정부시에 기념문학관도 생기니까 천상병 시인의 문학정신과 시들을 더 알리는 일을 해야죠. 예술제도 더 체계적으로 진행하도록 돕고요. 단지 기인으로서가 아니라 위대한 시인으로 재조명받는 일을 마치는 게 목표예요.
-가장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천상병 시인이 어떤 사람, 어떤 문인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나요.
▶한마디만 하고 싶어요. 그냥 순수하고 밝게 살았고, 주변의 누구든지 좋은 일이 생기면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이었다고요. 요즘 들어선 이런 가치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정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목순옥 씨는 매일 버스,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면서 오전 11시까지 인사동에 나왔다고 한다. 남편 살아 생전에도, 그 이후에도 계속된 여정이었다. 하지만 올해 1월부터 허리디스크를 앓는 바람에 25년간의 개근 기록은 깨지고 말았다. `귀천`이 아닌 의정부까지 굳이 찾아가서 인터뷰를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목씨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그 모습 그대로 `귀천`을 지켜 달라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고 말했던 시인을 오랫동안 추억하게 해 달라고.
[손동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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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2010.04.25 16: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