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 박세당
[경기일보 2008-10-24]
임금에게도 직언… 시대를 앞서간 ‘知性’
도봉산·삼각산(북한산)과 함께 서울 외곽의 3대 명산으로 일컬어지는 수락산은 경관이 뛰어나 예로부터 문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전기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들은 김시습이 보던 책을 모두 불태우고 머리를 깎은 뒤 세상을 등지고 숨어든 곳도 수락산이다. 그가 수락산의 주인(?)이 되어 동쪽 봉우리를 뜻하는 동봉(東峰)을 호로 삼은 지 2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 산 주인은 박세당으로 바뀐다. 상대적으로 박세당은 서쪽 계곡, 즉 서계(西溪)를 호로 삼아 동봉과 조화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박세당은 김시습을 흠모하여 그를 기념하는 영당과 사찰을 짓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으며, 수락산 일대의 산봉우리·골짜기·정자 등에 각각의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수락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이제 그의 자취를 따라가 보자.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 자락에 은둔
박세당(朴世堂·1629~1703)은 조선후기 출중한 가문 중의 하나인 반남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박상충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좌참찬 박동선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박정이다. 그는 아버지가 부사로 재직 중이던 남원에서 출생하였는데, 성장하면서 계속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즉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이어진 병자호란으로 인해 원주·안동·청주·천안 등지를 전전하다가 14세에 이르러서야 고모부인 정사무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닦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의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과거 공부에 전념할 나이에 연이어 어머니·할머니·셋째형의 상을 당하였고, 그의 나이 32세 때(1660) 비로소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과거가 늦은 대신 장원급제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정6품인 성균관전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함경북도병마평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그는 40세 때인 1668년에 갑자기 벼슬을 버리고 양주군 수락산 자락(현 의정부시 장암동 197번지 일대)으로 귀향해 버렸다. 이유가 뭘까. 박세당은 자신이 지은 묘표에서 ‘그 무렵 자신을 되돌아보니 재주는 짧고 힘은 부쳐서 세상에서 큰일을 할 능력도 없었고, 세상은 날이 갈수록 기강이 무너져 어떻게 바로잡을 방도가 없어서 관직을 벗어던지고 동대문 밖으로 물러났다’고 기록하였다. 이곳은 그의 아버지 박정이 인조반정공신에 책록되면서 받은 사패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곳을 석천동(石泉洞)이라 이름 짓고, 자신의 호를 ‘서쪽 개울에서 나무하는 늙은이’라는 뜻의 서계초수(西溪樵?)라 하였다. 서계는 이후 35년 동안 이곳에 은둔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통진현감으로 1년 근무한 것을 제외하고는 여러 차례 내려진 벼슬에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큰아들(박태유)과 둘째 아들(박태보)을 잃은 그로서는 무척이나 관직생활에 혐오를 느꼈으리라.
정치적으로 소론의 입장이었던 그는 말년에 노론의 공격을 받아 전라도로 귀양갈 상황에 처해졌지만 다행히 이를 면하고, 반평생을 살아온 석천동에서 생애를 마칠 수 있었다. 그의 묘역은 고택 뒷산으로 난 길을 따라 3백여m 가면 만날 수 있다. 본래 1666년에 타계한 부인 의령남씨의 장례를 치렀다가 그 후 서계와 의령남씨, 두 번째 부인인 광주정씨의 합장묘로 조성되었다. 묘역의 규모는 왕릉을 방불케 할 정도로 넓고 크며, 봉분은 네모꼴이다.
이밖에도 인근에는 서계 관련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고택에서 개울을 따라 오르다 보면 궤산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나온다. 이 정자는 박세당이 제자들과 학문을 연구하며 휴식을 취하던 곳으로 ‘아홉 길 높이의 산을 만드는 데 흙 한 삼태기가 모자라서 쌓은 공이 헛되이 되는 일’이 없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이름을 붙인 것이다. 또 정자 아래 바위에는 박세당의 친필로 석천동(石泉洞)·서계유거(西溪幽居)·취승대(聚勝臺)가 음각되어 있다. 이 중 취승대는 천하의 뛰어난 경치를 모아놓은 아름다운 장소라는 뜻으로 박세당이 가장 즐겨 찾던 곳이었다고 한다.
성리학 비판하다 사문난적으로 몰려
조선사회의 통치 철학인 성리학에 대한 반성 또는 비판은 16세기에 시작되어 17세기에 더욱 활발하였는데, 윤휴·윤증·박세당 등이 대표적이었다. 박세당은 논어·맹자·대학·중용·시경·상서 등은 생각이 깊어 그 본뜻을 흐트러뜨릴 수 없는 것인데, 후대 학자들이 훼손하였다고 인식하고 이를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저술한 것이 14책으로 된 ‘사변록(思辨錄)’이며, 이를 ‘통설(通說)’이라고도 한다. 1680년에 저술하기 시작하여 1693년에 완성하였으니 실로 방대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여기서 당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던 주자(朱子)의 주석을 비판하는 동시에 자신이 이해한 내용으로 독자적인 해석을 달았다. 나중에 그가 노론 세력으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 성현의 학문과 다른 해괴한 논리를 펼치는 도적)으로 몰리게 된 것도 ‘사변록’을 저술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박세당의 처남이자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의 설명을 들어보자. “당시 ‘사변록’은 상자 속에 넣어 둔 초본에 불과한 것이니 서계가 죄를 얻은 근원은 본래 이것이 아니다. … 죄를 주려 하는 까닭은 백헌(이경석)의 비문에 있는데, 핑계는 ‘사변록’을 들고 나오니, 이야말로 ‘뜻은 동쪽에 두고, 말은 서쪽에 있다’는 것으로 마음과 말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1702년 박세당은 74세의 나이에 자신의 마지막 작업으로 이경석의 신도비명을 지었다. 이경석은 병자호란 때 인조의 항복사실과, 청나라 태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이른바 삼전도비문을 지었다는 이유로 송시열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박세당은 이경석을 ‘나라 위해 가문을 잊고 임금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은 충신’으로 평하였으며, 그가 청의 압박 아래 부득이하게 삼전도비문을 지어야만 했던 상황을 두둔하는 입장이었다. 비문의 첫머리를 보면 “노성인(老成人, 이경석)의 귀중함이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노성인을 모욕하는 자(송시열)가 있다면 천하의 불상(不祥)함이 막대하다. 불상한 짓을 감히 한다면 또한 반드시 불상한 응보가 따를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도이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라 하여 송시열을 가리켜 노성인을 모욕한 불상한 무리로 규정하고, 마땅한 보복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명(銘)에서는 이경석을 봉황(군자)에, 송시열을 올빼미(옳지 못한 자)에 비유하는 한편 송시열은 거짓을 자행하고도 저명하게 된 인물이라고 비꼬았다. 그러자 곧바로 성균관 유생을 중심으로 박세당에 대한 성토가 시작되었다. 위로는 주자를 능멸하고 아래로는 송시열을 모욕했다는 게 그의 죄목이었다. 결국 노론세력은 이 비문을 계기로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일 생각이었고, 빌미로 삼은 것이 ‘사변록’이었던 것이다. ‘사변록’은 남구만의 얘기처럼 초고본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사상계를 흔들 만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숙종은 ‘사변록’을 압수하여 조목마다 비판하는 글을 짓게 하고 박세당에게는 삭탈관직과 유배의 벌을 내렸으며, ‘사변록’과 이경석의 비문은 불태우라고 명하였다.
어떤 시련에도 세상에 고개를 숙이지 않다
박세당은 그의 길지 않은 관직생활 동안 직언을 서슴지 않기로 유명하였다. 현종이 온천욕을 유달리 좋아하여 막대한 경비를 소비하고 백성에게도 해를 끼치자, 박세당은 즉시 이같은 임금의 온천행에 따른 폐단을 지적하며 자제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국왕과 대신의 직무 태만, 왕실의 재물낭비 등을 거론하는가 하면, 요역과 병역의 균등, 법률 혁신, 정치·사화제도 개혁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양반의 무위도식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즉 백성의 80%가 천민·평민이고, 나머지가 사대부양반인 상황에서 십중팔구 놀고먹는 양반은 나라의 녹을 받아먹는 좀(?)일 뿐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그는 거리낌 없이 직언을 잘 한다 해서 감언지사(敢言之士)로 불렸다.
한편 성리학을 정통 이론으로 삼던 조선사회에서는 반(反)주자학적인 박세당의 학문적 입장이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학문적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반대세력으로부터 사람됨이 치우치고 어긋나며 집요한 병통이 있다는 혹평이 뒤따랐다. 이에 비해 서계의 제자인 이덕수는 “맹자가 말씀하시길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이 절개를 옮겨 놓지 못하며, 위무가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는 것을 대장부라 한다’고 하셨거늘 천년 뒤에 구해보노라면 이 말씀에 부합되는 이는 오직 선생 한 분 뿐일 것이다”라며 스승을 진정한 대장부로 평가하였다. 박세당 또한 자신이 생전에 지어놓은 묘표에서 자신의 생애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차라리 외롭고 쓸쓸하게 남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살아갈지언정, 이런 세상에 태어났으니 이런 세상을 위해 일하고 좋게좋게 지내면 되지 않느냐는 자들에게 머리를 수그린 채 뒤따르는 짓거리는 결단코 하지 않겠다”
결국 병자호란에 이은 계속되는 당쟁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살았던 박세당은, 선현의 학설을 덮어놓고 따르던 기존의 학문적 풍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경전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사상의 자주성을 주창한 ‘시대를 앞서간 지성인’이었다고 하겠다.
/김명우 경기도도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문학박사